명징하게 재구성되는 삶의 찬연한 이야기들

                                                                                                                                                                                                         




                                                                                                                                                                                                            문희영 (예술공간 집 대표)






  



일상의 가치를 들춰낸다는 것
  한 인간의 내면으로 침투한 삶의 단면들이 시각화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그 이면과 단면들에 파고든 숱한 감정과 감각들은 시대의 서사를 만들고 예술이라는 영혼으로 다시 사람들의 마음 안에 파고든다. 삶에 내재한 가치들을 들추고 되뇌는 것, 유지원 작가의 작품이 주목하는 방향이다. ‘가치’의 축은 자신으로부터 사회의 반영까지, 개인의 사유를 넘어 시대의 가치를 향해 광범위하게 뻗어나간다.
 10여 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에게 한국 사회의 생경한 풍경들은 급격한 변화상을 그대로 보여줬다. 변화의 이면 사라져가고 버려진 것들이 시선에 박혔다. 많은 곳이 재개발로 허물어지고 몸살을 앓는 풍경들을 마주하며 그 속살을 다시 바라보았다. 바로 유지원 작가가 주목하는 ‘가치’의 대상들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는 삶의 온기를 자꾸 차갑게 폐허로 뒤덮어 버렸다. 개인의 기억과 추억, 함께 부대끼던 사람다움의 체취, 자연과 공감할 수 있었던 흔적들이 사라져가는 것, 결국 삶의 역사가 무참히 허물어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그 ‘가치’를 들추어내고자 했다. 인간과 맞닿았던 공간과 흔적들에서 다시 일상의 의미를 찾아내고 느끼는 순간 삶과 예술의 가치는 재탄생되기 시작한다. 


예술로 발견해가는 ‘쓸모’에 대하여
  현시대의 삶에서 ‘예술’과 ‘쓸모’라는 것, 예술가로 살아가는 일과 쓸모를 생산하는 일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어떤 다름이 있을까. 무형과 유형의 경계선에서 예술은 어쩌면 늘 약자이다. 유지원의 작품세계 또한 이 ‘쓸모’라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가장 힘든 시간을 겪었을 때 작가는 인간과 맞닿아 있었던 사물과 특정 공간 사이에서 ‘쓸모’가 과연 무엇인지 파헤쳐 가는 상황으로 자신을 투입했다. 유학 시절 제작한 영상 작품인 < 예술가의 여정 >(2015)은 동료들과 유지원 작가가 함께 현지인들도 그다지 돌아보지 않는 버려진 철로를 따라가는 여정을 담았다. 버려진 사물들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고, 이를 하염없이 끌고 가며 풀만 무성히 자란 철로를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 특별한 것 없는 영상은 묘하게 시선을 붙든다. 쓸모의 생명을 다한 철로와 주변에 버려진 삶의 잔해와 같은 사물들, 이것들로 무언가를 생성해내는 예술가. 이 세 조합은 오묘하게 어우러지며 시선을 고정케 한다. 그들이 벌인 일은 쓸모없음으로부터 ‘가치’의 생성이랄 수 있다. 고민하고 또 즐거워하며 뜨거운 태양 아래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다시 질문이 튀어나온다. 과연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있을까. ‘쓸모없음’이란 명제는 어떤 기준으로 우리 삶에 적용되는가. 삶의 바깥으로 드러난 표피와 내면에 잠재한 의식의 교차는 끊임없이 서로 순환하듯 꼬리에 꼬리를 문다. 쓸모가 사라진 공간과 사물들은 도리어 쓸모의 사유를 끌어낸다. 버려진 삶의 잔해들은 더 이상 사용 가치 없이 방치된 쓰레기가 아닌, ‘예술’이 도구가 되어 새로이 생성되는 작품의 재료로 치환되었다. 이 상황을 파헤쳐 가는 세 사람은 ‘예술가’라는 존재로 조금은 불명확했던 자신들의 가치를 확립했다. 작품이 증명한 것은 사물이나 공간의 쓸모보다는, 이를 쓸모 있게 만들어가는 ‘예술’이라는 무형의 가치이다. 무용한 것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새로이 가치를 발견해나갔다. 발견하고 들춤으로 인해서 재인식되는 삶의 이면들, 결국 ‘예술’이 우리네 삶에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얼마나 특별함을 가지는지 증명한 것이다. 


체화하고 교감하며 발현해내는 ‘가치’의 풍경
  유지원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을 포괄하는 ‘가치의 재구성’이라는 키워드를 형성하는 두 축, 작품의 주제가 되는 대상으로서의 ‘가치’와 만들어가는 방식으로서의 ‘재구성’ 사이 존재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작가 자신이다. 작가는 평범한 삶의 흔적이 베인 공간과 상황들로 직접 깊숙이 들어간다. 어떤 가치를 선택하든,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구현해가든 그 중심에는 작가의 체화된 감각이 존재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작품 안에 자신을 깊숙이 이입시킨다. 작가 스스로 주체적 존재로 작품을 끌어가는 시간과 공간 안에 몸과 마음을 집어넣는다. 작품의 소재, 혹은 대상이 되는 것들 앞에서 이를 재현하거나 관조하지만 않는다. 몸이 함께 이입되며 체화해가는 과정은 유지원 작가의 작품세계를 아우르는 중요한 과정이다. 작품 안에서 작품을 이끌어가며 필연이 만들어 낸 우연의 지점들을 포괄해가며 작품을 완성해나간다. 행동하는 주체로서 작품에 이입된 작가는 스스로 던진 질문을 재구성해나가고, 다시 열린 질문으로 관람자들에게 가치를 되물음으로 작품을 귀결짓는다. 
 (2022), < 중첩된 공간 >(2022)은 지난해 경기도 성남에 있는 오래된 집을 방문한 후 제작한 작품이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진 협소한 집으로, 세 가족이 모여 살았을 집의 특정 공간들을 토대로 재구성된 작품이다. 은 실제 펼쳐지고 다시 조립되는 키트 형식으로 다락방의 모형에서 비롯되었다. < 중첩된 공간 >은 부엌이라는 장소가 모티브가 된 작품으로 타일과 파이프 등의 재료들이 중첩되며 새로운 구조체가 되었다. 작은 집의 부엌, 구수한 밥냄새 가득했을 공간의 온기를 소환했다. 작가는 오랜 세월을 간직한 집에 담긴 시간과 공간의 체취와 여기 살았을 누군가의 흔적을 마음에 차곡차곡 눌러 담았다. 평범한 삶의 시간이 쌓여가며 삶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인간의 체취는 사라졌을지라도 시대의 단면을 오롯이 품은 공간이다. 오래되어 거미줄 가득한 다락방도, 먼지가 가득해진 부엌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삶을 채웠을 공간들이다. 폐허의 공간에서 다시 시간을 복기해가며 작가는 동시대를 살아온 한 개인으로 공간에 베인 내음을 추적해냈다. 공간과 작가가 교감하는 순간은 작가로서 작품의 대상을 올곧게 체화하는 단계이다. 작품의 주요 대상으로 거리를 두지 않고 그 안으로 자신을 휘몰아치는 것이다.


명쾌하게, 또 절묘하게 비틀어내기
  체화된 공감각은 표면의 형상 너머 속살을 톺아내고 살짝 비틀어내는 힘을 부여한다. ‘비틂’은 유지원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이다. 형상의 비틂은 대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전달하고자 하는지를 더욱 명확하게 한다. (2023) 작품 또한 집의 외형과 내면의 함의가 중첩되며 비틀어진 명쾌함이 절묘하다. 과거 주택이 주요 주거방식이었을 때의 상징적 형상인 양옥집의 모형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작가는 집의 외형을 살짝 기울여 놓았다. 수평이 살짝 비틀린 집은 ‘저물다’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침잠하며 쓰러질 듯, 기울어진 집의 외형은 한 시대가 저물어갔음을 대변한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나타나는 일, 인간의 육신도 자연으로 저물어가듯 한때 왁자지껄 번성했을 집의 시간도 저물어간다. 건축적 구조물로서의 집이 아닌 시대를 상징하는 상징체로서의 집이다. 외형을 넘어 시대의 흐름과 변화 속 사라진 것들이 무엇이며, 저물어감을 이토록 안타까워하는 마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평범한 일상이 깃든 공간 속 감정과 감각들이 들추어진다. 일상을 공유하던 교감의 정서가 서서히 사라지듯, 현 사회 안에서 건조해져만 가는 삶의 감정들이 못내 아쉬운 마음은 수평을 잃어버린 집의 형상으로 남았다. 관람객은 직접 작품 안으로 들어가 기울어진 천장 아래 불안한 상황과 맞닿게 되며 작가가 들춰내고자 했던 ‘가치’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생각하게 된다. 근시안적으로 본 하나의 집이 아닌 거시적 시각으로 해석되는 시대의 단면을 다시 복기한다. 변화라는 외적 현상만을 집중하지 않기에 더 인상적이며, 그 안에 스민 감정들을 캐내어 주기에 더 특별하다. 외형의 비틂은 시각과 감각 체계의 틈을 슬며시 비틀어준다. 저물어가는 집이 못내 안타까운 것은 그 안에 스며있던 따스한 온기마저 사라져 가는 현실이 이리도 실질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입되고 동화되며 재구성되는 가치  
  지난 2021년 열렸던 < 공간의 구조화 : 폐허의 미학 >(뽕뽕브릿지) 전시는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설치로 이뤄졌다. 전시는 보여지는 것을 넘어 관객을 끌어들이는 이입의 주체가 되었다. 이는 2019년  전시에서, 당시 주변에 버려진 골판지들을 며칠간 모아서 작품을 완성했던 것에서 확장하여 좀 더 나아간 시도였다. 전시공간 전체를 활용한 작품으로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으로 관람객들을 이입시켰다. 몸이 이입되며 몸 전체의 감각으로 작품을 체화해나가고 작품과 동화되는 경험이 가능했다. ‘몸의 이입’은 작품과의 접속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게 했다. 작가뿐 아니라 관람자도 함께 작품으로 몰입해감을 가능케 하며 작품을 폭넓게 인지하게 했다. 폐허가 되었을지라도 인간의 체취와 맞닿았던 공간의 내음을 재구성해나가는 작품의 이유를 몸과 마음이 동시에 교감해가는 것이다. 
 이렇듯 ‘재구성’은 작품이 제작되는 방식이자 관람자가 ‘가치’를 인지해나가는 형상이다. 간결한 선과 면, 그리고 집약적으로 추출된 색면으로 재구성된다. 그간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개체로도 볼 수 있지만, 서로 내적 유기적으로 연결 또한 가능하다. 각 작품들의 토대가 된 본래의 대상은 다를지언정 과거의 시공간을 품어온 특정 사물들이거나 장소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것은 재구성의 단계에서 튀어나오는 조형성이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이다. 타일, 파이프, 나무, 골판지 등 다양한 재료들의 조합이지만 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작가의 조형감각이다. 더불어 색도 중요한 매체로 작용한다. ‘가치’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되 가치의 의미 혹은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뉘앙스를 전달한다. 작품이 발현해내는 감각적 조형과 이를 덧입혀주고 있는 색채는 유지원 작가만의 특별한 힘이다. 입체, 설치, 미디어 등 여러 매체를 넘나들며 작품을 해나가지만, 특정 매체로 귀결되지 않음 또한 작품의 주제에 집중하는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가 추구해나가는 ‘가치’의 ‘재구성’은 집약적이고도 다채롭게 다양한 함의를 포괄하며 무한한 궤도를 향해 나아간다. 
 삶에 깃든 ‘가치’를 ‘재구성’한다는 것, 가치가 향하는 지점은 결국 우리들의 현재가 아닐까. 너무 메마르지 않게 인간다움의 가치를 상실하지 않는 것, 유지원 작가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각인해주는 것이다. 무용하다고 규정된 숱한 것들을 예술로 덧입혀나가며 삶의 평범함이 이토록 ‘가치’있음을 더욱 찬연하게 파헤쳐 가기를 기대해 본다.
‌                                                                                                                                                                                    





                                                                                                                                                                                    2023 <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빛2023' > 비평글













Brilliant Stories of Lucidly Reconfigured Life
 




                                                                                                                                                                   Moon Heeyoung (director, Artspace House)









Uncovering everyday values
Fragments are visualized from a life that permeates into a human being’s interior. Not only the things immediately visible but the many emotions and sensations that burrow behind them and into their pieces come to form a historical narrative, before delving into people’s hearts once again through the soul of art. This is the focus of artist Yu Jiwon’s artwork: uncovering and reflecting on the inherent values in lives. The scope of “values” extends beyond individual thinking into the broader realm of historical values, from the self to reflections of a society.
 As the artist returned from a decade spent studying overseas, the unfamiliar landscapes he saw in Korea showed an image of rapid change. His eyes took in the things that had disappeared or been abandoned within that change. Confronted with sickly scenes where many things had been torn down to make way for redevelopment, he directed his gaze back at their flesh.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values” that Yu focuses on. A fast-changing society relentlessly covered over the warmth of life within cold ruins. Individual memories and associations, the scent of humanity that once hovered together, the traces of what was once shared with nature – mourning the loss of these things, the brutal collapse of a history of life, the artist sought to uncover those values. The values of life and art begin to emerge anew as we rediscover and sense the significance of the everyday in the spaces and traces that once connected with us.


On the “usefulness” discovered through art
 In contemporary life, what difference can be found between “art” and “usefulness”--between living as an artist and producing utility? On the boundary between the tangible and intangible, art tends always to always be the weaker. Yu Jiwon’s artistic body of work similarly starts from this place of “usefulness.” Faced with the most trying of times, the artist threw himself into a situation of exploring what usefulness really is among the objects and spaces connected with human beings. Le trajet de l’artiste (2015), a video work that he produced while studying overseas, shows the artist and his colleagues journeying along an abandoned railroad that even locals pay little notice to. He pounds together something out of abandoned objects and drags it along as he presses onward along a track that is now overrun by weeds. Though there is nothing particularly special about it, the video is oddly captivating: a railroad that has lived out its useful life, objects like discarded remnants of life around it, and the artist creating something with them. These three elements combine in mysterious ways that transfix the gaze. What the participants have done can be described as creating “value” out of “uselessness.” Seeing them both puzzling and enjoying themselves as they move ever forward until the broiling sun, we are confronted with another question: can anything in our world be truly useless? By what standard does the idea of “uselessness” get applied to our lives? The surfaces visible in our outer lives and the latent consciousness within intersect in an endless cycle, one leading into the other. Stripped of their usefulness, spaces and objects only evoke thoughts of use. Discarded remnants of life are no longer waste that is ignored as having no useful value; they become material for new work that is created through the tool of art. Making their way through this situation, the three people cement their own values as “artists,” which had been slightly uncertain. What the work demonstrates is not the usefulness of objects or spaces as such, but the intangible value of art that renders them useful. Breathing life into the useless, they have discovered new value. The hidden aspects of life that are perceived through their act of discovering and uncovering offer proof of how powerful art is in our lives, and how special things that are “nothing special” can be. 


Realizing “value” landscapes through embodiment and communion
Between the two elements of the “reconfiguring values” theme that encompasses Yu Jiwon’s body of artistic work – values as an artistic topic and reconfiguring as a method of creation – there is something else present: the artist himself. Yu delves personally into spaces and situations imbued with the marks of ordinary life. Whatever values he selects and whatever methods he uses to realize his work, his own internalized senses are present at the center. To this end, he projects himself profoundly into his work. As a subjective being, he puts his body and heart into the times and spaces through which he propels his work forward. He does not merely represent or contemplate the materials and focuses of his art. This process of the body’s projection and internalization is a key element throughout Yu’s oeuvre. He drives his work from within, completing his creations by encompassing the moments of randomness born from necessity. Projected into the work as an active subject, he reconfigures the questions he poses to himself and completes his work by raising open questions about values in the viewers.

 The works House Kit-Attic (2022) and Layered Space (2022) were created after Yu’s visit last year to an old house in the city of Seongnam. They were configured from the spaces in a cramped house built in the early 1970s – where a family of three might have lived. Adopting the format of a “kit” that can be opened up and reassembled, House Kit-Attic originated in a model of an attic. The motif for Layered Space is the kitchen as a setting, with a new structure emerging through the layering of materials such as tiles and pipes. Yu has recalled the warmth of a kitchen in a small house, a space that might have been filled with the savory smells of different dishes. Into his mind he impressed the scents of time and space contained in a house with a long history, along with the evidence of the occupants it might have had. A history of life is formed from the layering of ordinary moments. While the human scents may be gone now, the space still harbors aspects of its era. The old, cobwebbed attic and the dusty kitchen are spaces that would have enriched someone’s life at some past time. Looking back over the time in a ruined setting, the artist traces the scents imbued there as another individual who has lived through the contemporary era. This experience of communion between space and artist is a stage in which he straightforwardly internalizes the object of his work. Instead of distancing himself from a major artistic force, he drives himself inside of it.


Twisting clearly yet delicately
The internalized synesthesia introduces a force that explores and gently twists the flesh beyond the surface forms. “Twisting” is quite an important theme in Yu Jiwon’s body of work. The twisting of form makes it clearly how an object is being interpreted and expressed. The work Home (2023) boasts a subtly twisted lucidity with its layering of the implications of the house’s exterior and interior. It originated with a model of a Western-style home (yangokjip) – a symbolic style from a day when such residences were the main mode of living in Korea. Yu presents the house’s exterior at a slight angle. With its vertical axis twisted in this way, the house evokes associations with the word “falling.” This listing in the house’s exterior, as though it is somehow subsiding, speaks to the passage of an era. This is a natural outcome of the passing of time: just as human bodies return to nature, so there comes an end to a house that might have flourished in some bygone day. This is not a house as an architectural structure; it is a house as a symbol representing a historical time. Beyond this outward face, what things might have disappeared amid these changes and flows of time? What is the nature of our feelings of mourning for their passage? Emotions and sensations are called forth from a space imbued with ordinary existence. Much like the fading of feelings of communion and the sharing of daily experience, what remains in the shape of this house without a horizon is a feeling of constant sadness for emotions of life that grow ever more barren in our present-day society. Venturing inside the work, viewers are confronted with a precarious situation underneath the sloping roof, which causes them to ponder the direction pointed out by the “values” that Yu sought to uncover. They reexamine aspects of society that are interpreted not myopically as a single house, but from a larger-scale perspective. It is all the more striking for not fixating only on change as an outward phenomenon; it is all the more special for how it uncovers the emotions permeating within. This outward twisting has the effect of subtly twisting the gap between the visual and other perceptual systems. Perhaps the reason the falling house seems so mournful is because of the acute reality in which the human warmth within simply fades away.


Reconfiguring values through projection and identification
  The 2021 exhibition Structuring of Space: Aesthetic of Ruins (space ppong) consisted of an installation that encompassed its entire setting. The exhibition became a subject of projection drawing the viewer beyond what was visible. This was an expansion of what the artist attempted with his 2019 exhibition Trace – Aesthetic of Ruins, where he spent several days assembling abandoned cardboard from his surroundings to create his artwork. Making use of the entire exhibition setting, the work projects viewers into the imaginary space that Yu has created. As the body is projected, the work is internalized through its overall senses, enabling an experience of identification with the art. This projection facilitates a deeper exploration of connection with the artwork. Allowing not only the artist but also the viewer to become immersed in the work, this permits a broader perception of it. Body and mind relate simultaneously to the reasons behind an artwork that reconfigures the odor of a (now ruined) space that once bore connections with human scents.
 In this sense, “reconfiguring” is both the method of artistic creation and the form through which the viewer recognizes “value.” The reconfigurations appear as concise lines and planes and condensed color surfaces. Yu’s past creations can be viewed individually, but they also admit organic internal connections. The original basis for the work may be different, but they have a common denominator in terms of specific objects or places that harbor past times. The particularly special element here is how aesthetic the reconfigured works are. They reflect a wide range of materials (tiles, pipes, wood, cardboard) but are bound together by the artist’s aesthetic sense. Color also functions as a key medium. Yu may be reconfiguring values visually, but he conveys nuance rather than explaining the meaning or concept behind the values. His unique and special strength lies in the sensory shaping of his work and the coloring that he applies to it. His artwork may cut across different approaches such as sculptures, installation, and media, but the fact they are not reducible to particular media can be seen as reflecting the power of Yu’s focus on his theme. The “values” and “reconfiguring” that he attempts are diverse and concentrated, encompassing multiple meanings while proceeding on a course of infinite dimensions.

 When the values present in our life are “reconfigured,” those values are oriented toward the current moment. In the name of art, Yu Jiwon constantly underscores how the values of humanity are not lost to barrenness. As he artistically overlays various things regarded as “useless,” I look forward to seeing him delve even more brilliantly into the value of ordinary life.






































조각이 세상의 위태로움을 건드린다면

                                                                                                                                                                                                         




                                                                                                                                                                                                            정현(인하대학교, 미술비평)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인간 세계에서 한껏 범람한 빈곤, 불안, 불평등은 지구의 위태로움이 강렬하게 포착되는 시대에 어떤 위치에 놓이는가?”
 - 조문영, 빈곤 과정, 글항아리, 2020, 357쪽




불평등에 관하여

도시는 태생적으로 잠들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전기 에너지, 증기 기관차, 사진, 엔진, 자동차 그리고 영상이라는 근대를 열어젖힌 인공적 발명품과도 무관하지 않다. 유럽의 근대화는 산업화를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구체제의 몰락은 신분제의 타파로 이어진다. 자유인이 된 개인, 시민, 국민은 기업과 국가를 위하여 자신의 노동력을 바친다. 충분한 대가가 치러지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인간이 도시를 창조했지만, 도시에 길들여진 건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도시의 삶은 가장 안락한 상태를 향하여 발전한다. 에어컨의  기초가 된 공조장치를 개발한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Willis Haviland Carrier, 1876~1950) 덕분에 뉴욕 맨하튼은 기후영향을 받지 않고 쾌적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건축물이 세워질 수 있었다. 인간의 욕망은 점차 인공의 힘에 기대어 자연을 통제하기에 이른다. 사실 그 덕분에 우리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해졌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한강 조망권의 아파트의 흡음창과 공조장치는 소음과 냄새를 지워버림으로써 이른바 뷰(view)라고 일컫는 풍경의 가치를 제공한다. 기후위기와 환경오염은 인간의 자연 수탈로 비롯되었으나, 인류는  멸균 상태의 위생화를 통하여 안전과 쾌적함을 삶의 가치로 미학화하기에 열중한다. 그 이면에는 유해한 동식물을 구분하고 생태계 파괴의 원인을 교란종과 정책 등의 탓으로 돌려 회피하고자 한다. 디지털기술에 의해 조성된 쾌적한 환경의 이면에는 컴퓨터의 열을 없애기 위해 엄청난 양의 전기 소비와 탄소배출이라는 야누스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처럼 전 지구적인 도시에서의 삶은 계층에 따라 분명한 절취선이 그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발터 벤야민은 기계기술에 의한 복제 가능성 덕분에 전통적인 신분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의 바람처럼 대부분의 동시대인은 쉽게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평한 통신권과 문화적 향유만을 근거로 사회적 불평등이 해소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도시는 쉴 틈 없이 쓰레기를 배출하는데, 그것을 분류하는 사람들은 일상의 시작 이전과 이후에만 나타난다. 도시의 규모와 쓰레기의 양은 비례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쓰레기를 비체화한 사회적 풍토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위생화에 많게나 적게 길들여진 상태이다. 쓰레기 매립지를 선정할 때마다 발생하는 잡음은 도시인의 이중적 태도를 적나라한 ‘내로남불’의 심리를 드러낸다. 도시는 점점 더 삶의 흔적을 지우고자 한다. 도시의 세련됨은 쇼윈도우에 배치된 상품과 날렵한 자동차와 대형빌딩에 세워진 미디어 파사드, 눈길을 사로잡는 홍보물과 화려한 건축물로 대표된다. 기술의 발전은 도시를 재현하는 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대도시의 홍보 영상은 날렵한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자동차와 퍼포먼스, 현대미술, 대중음악, 클래식음악 공연 현장과 그 대구(對句)로 전통문화가 나란히 등장하고 높고 유려한 빌딩과 고궁, 자연광경, 등산객, 프로스포츠, 쾌적한 공원, 세계인이 한데 모인 장면 등을 연출한다. 어린이, 청소년, 다양한 직업군, 희귀한 천연기념물과 깨끗한 산하, 농부의 미소도 빼놓으면 안 된다. 도시의 표피에는 빈곤의 그림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연히 분쟁의 장면, 재난현장도 삭제된다. 이 상징계의 스크린은 긍정의 이미지만 허락되기 때문이다. 지하철 광고판, 미디어 파사드가 쏟아내는 초현실적인 미디어아트의 장면, 버스정류장에 설치된 전광판의 기계음성은 연신 도착 예정 시간을 알려준다. 디지털 알고리듬이 접합된 증강현실은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다수가 요구하는 필요한 것들만을 모아서 기술의 유용성을 뽐낸다. 네비게이션은 더 빠르고 더 안전한 길을 쉼 없이 갈무리한다. 마치 빨리 가는 것만이 최선의, 그리고 최고의 선택인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나처럼 빠른 길보다 익숙한 길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뭐랄까? 익숙한 풍경이 주는 위안이 있다. 때론 익숙함은 변화를 알아차리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빠른 길은 풍경을 주워 담아 사유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도시는 새로움에 도취되었고 그것이 사라지면 금세 지루한 게 되어 버린다. 



조각적 행위에 의한 문화기술지

유지원에게 예술은 살아갈 힘, 계속 걸어갈 수 있는 동기,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의 작업의 근간은 버려진 잔해들, 사람의 관심에서 벗어난 이름도 없고 쓸모도 사라진,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방치된 것들로부터 출발한다. 버려진 것들에 대한 관심은 프랑스 유학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이방인의 삶이란 국적을 막론하고 부유하는 존재이다. 작가는 알프스 근방의 도시에서 미술학교를 다녔다. 너무도 당연하게 동양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곳에서 ‘운명적으로’ 2명의 동양인 친구를 만난다. 하릴없이 폐철로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마을 주변에 치우지 못한 쓰레기 더미를 발견한다. 목적 없이 쓰레기를 치우다보니 마을 주민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보인다. 내친김에 쓰레기를 사용하여 트레일러를 제작하게 된다. 폐철로를 덮은 무명의 식물들을 치우고 트레일러에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것들을 싣고 앞으로 나아갔다. 목적지가 없는 움직임이었다. 덕분에 주변 이웃들이 관심을 보낸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 “예술가의 여정(Le trajet de l’artiste, single channel video, 2015)”은 앞으로의 작업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상식적으로 마을에 쓰레기가 쌓여있다는 사실은 지역문제와 공공제도 사이의 공백이 있음을 알려주는 부분일 것이다. 작가는 귀국 후 광주광역시에 터를 잡은 후에도 당시와 유사한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바로 광주 남구 월산동 재개발 지역이 오랜 시간 방치된 현장으로 작가는 그곳에서 “예술가의 여정”의 대구(對句) 작업인 Trace-Collector(2019)를 진행한다. 공사 중단으로 인한 재정적 피해도 크지만 한때 삶의 터전이었던 곳의 기억들이 해체되고 분해되어 산화하는 것 또한 비가시적인 피해일 것이다. 작가에게 버려진 공간은 단순히 이사를 간 빈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말해 차갑게 식어버린 사회적 신체의 죽음과 다름없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도시는 새로운 것이기에 오래된 것을 가리거나 과거를 지우기도 한다. 이제 사회적 불평등은 개인의 문제를 벗어나 제도의 책임이 되어 버렸다. 제도는 개인을 평가하고 분류한다. 개인을 분류하는 체계의 원리는 주로 소득(자산)과 장애를 중심으로 한다. 금융자본과 신체의 질병 여부에 의해 분류된 행정서류 속 개인은 평가항목에 대한 기술(description)과 등급 그리고 기준에 따른 상벌 체계로 존재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옥, 병원, 요양원, 기숙사 등의 설립과 도시의 관계를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 명명했다. 정부는 위의 시설을 설립하여 관리보호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를 구속한다. 그들은 도시생활에 부적합한 부류라는 낙인과 함께 도시에서 추방되거나 감금된다. 새로운 유형의 건물은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여 생성될 수 있다. 물론 동일한 이유로 해체될 수도 있다. 도시의 빠른 현대화는 과거의 주거형태를 낡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번역하여 새로운 것이 곧 좋고 옳은 것이라는 의견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이른바 신시가지의 개발은 황금알을 낳는 불패신화를 쓴다. 개발주의는 지구의 유산을 탈탈 털어 금융자본의 대상으로 둔갑시킨다. 유지원은 버려진 공간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조형적 단서로 끌어와 전시장 공간에 기생하는 공간을 삽입시킨다. 남겨진 불완전한 형태를 일종의 건축적 장식 기능으로 은유한다(Trace-A, 골판지, 나무, 아크릴 채색, 2018/ Trace-E, 골판지, 나무, 아크릴 채색, 2018). 공간 안에 끼어들어간 또 다른 공간/장식물은 마치 유기체처럼 주어진 공간의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고 왜곡되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공간의 구조화: 페허의 미학(Space structuring: The aesthetics of ruin, 설치, 혼합매체, 2021)”). 과연 이 과정을 재영토화라고 명명해도 될지 모르겠다. 비체라 부를 수 있는 잔존하는 흔적들은 적어도 전시 기간 동안 불필요한 부산물 또는 무의미한 장식물에서 벗어나 쓸모없음과 부족한 상태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골판지와 목재 등 매우 가볍고 다루기 수월한 재료는 단순히 제작의 편리함으로 선택된 것은 아닐 것이다. 빈곤한 삶의 기호가 된 폐지 줍는 노인에서 비롯된 조형적 질료는 작가의 윤리적인 태도를 나타냄과 동시에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연결시킨다. 예컨대 건축가 이타미 준(Itami Jun, 본명 유동룡, 1937~2011)은 원래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건축을 추구했다. 땅을 평평하게 하는 평탄화 작업 대신 지형을 살려 높낮이에 따라 계단이 세워졌다. 자연스럽게 땅의 표정과 형태를 따라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들뢰즈가 말한 배치의 미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개발에 의해 축조된 현대도시는 축축하고 눅눅하다. 인공의 힘을 빌려야만 습기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동맥경화가 걸린 것처럼 도시의 몸과 마음은 힘겹게 하루를 버틴다. 파리와 리우데자네이루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개념미술가 도미니크 곤잘레즈-포에스테(Dominique Gonzalez-Foester, 1965)는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를 방문한다. 이 방문은 물론 의도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은 모더니티의 이상으로 세워진 도시를 따라가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대도시를 통해 모더니티의 이상은 실현되었다, 전 지구의 대부분 도시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덧붙여지는데, 그것은 바로 열대라는 기후조건이다. 세계화와 인공화의 현장을 따라가되 열대라는 조건에 맞춰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다. 브라질리아는 완전한 인공도시이다. 당시 대통령은 브라질의 수도를 새로 개발했고 그 모델은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의 빛나는 도시(La Ville Radieuse)를 참조하였다고 한다. 완벽한 대칭 구조의 인공미를 강조한 이 도시는 열대에 속하는 브라질의 환경과는 매우 동떨어진 건축 프로젝트인 셈이다. 도미니크는 관광객의 입장으로 캠코더를 임대한 후 브라질리아의 건축양식과 자연환경 사이의 부조화를 촬영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이런저런 코멘트를 내뱉는다.  



어셈블리지, 공간의 재배치

빠른 근대화를 이룩한 유럽의 1960년대는 과도한 산업화로 인한 인간 소외가 나타났다. 이는 실존주의 철학과 국제상황주의와 같은 문화적 운동으로 불붙게 된다. 도구로서의 인간, 노동의 장소로서의 도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학생, 지식인, 예술가, 활동가 등은 도시의 잠재력을 찾기 위하여 어떻게든 도시에 대한 사유와 실천의 방법을 찾아 나선다. 권력, 정치 그리고 산업에 의하여 구성된 도시가 과연 어떻게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들의 바람은 집단적인 만남, 양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 권력을 생산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합리성을 뒤로 하고 예술적 흐름을 도시 안에 배태하고자 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를 구성하는 배치의 방식을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렇듯 집단적인 관점으로 구조화된 삶의 형태를 소수적이면서 미시적인 세계를 위한 배치(agencement(fr)/assemblage(en))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배치의 미학이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특정 직업이나 활동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추구하는 대신, 그들의 행동, 발화 방식, 표현의 강도에 따라 감지할 수 있는 운율과 속도 그리고 분위기(tone) 등의 연결을 통하여 세계를 관측해보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동(affect)이 발생하는 것이다. 

유지원의 작업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세상의 주변부를 배회하면서 버려진 것들, 외면  당한 사람들, 낡은 길과 이름 모를 풀들을 만났다. 그 사이에서 부지런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삶의 잔해들을 모았다. 사실 목적을 가진 행동은 아니었지만, 때로는 타인이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실은 그런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렇게 맺은 관계 덕분에 버려진 것들, 이름 붙이지 못한 존재들, 사라지거나 사라질 흔적을 추적하는 중이다. 자칫 지나치게 인간애를 호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의 조각적 태도는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또는 빼앗긴 빈곤의 자리, 리어카의 보이지 않는 스키드마크를 연약한 재료와 화려한 색깔과 건축적 구조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1) 르 코르뷔지에가 1933년에 출간한 저서로 도심 중심에 고층건물단지를 조성하고 그 주변에 녹지를 위치시켜 도시와 전원을 모두 충족시키는 제안이었으나 마치 한국의 아파트단지와 같이 내부에서 자연을 향유할 수밖에 없는 일률적이고 반생태학적인 도시계획이라 평가받은 모더니즘의 이상을 대표하는 프로젝트였다.
‌                                                                                                                                                                                           2022 < 광주시립미술관 국제레지던시 > 비평글













When Sculpture Reveals the Precariousness of the World 
 




“What are the places of poverty, anxiety and inequality, which have plagued the human world over the past centuries, in an era when Earth is clearly under serious threat?” 
- Mun Young Cho, Poverty as Process, Geulhangari, 2020, p.357



About Inequality

It looks as though cities are, by nature, incapable of falling asleep. To a certain degree, this has to do with the artificial inventions that opened up the modern era of electric power, steam locomotives, photography, engines, cars, and images. The major driving force behind this rapid modernization in Europe was industrialization. The collapse of the old order has led to the breakdown of the social hierarchy system. Individuals with new-found freedom began to dedicate their labor to their country and its businesses, the consequences of which took a while to become apparent. Though we humans were the very architects of these cities, we ended up being tamed by our own creations. Life in the city develops in a way that it can bring the most comfort to its inhabitants. Thanks to the modern air-conditioning system developed by Willis Haviland Carrier (1876~1950), for example, it was possible to construct buildings in Manhattan, New York, where people could work comfortably without being influenced by the weather. Driven by desire, humans have gone a step further to gradually take control of nature on the strength of artificiality. In fact, it is undeniable that this has made our lives much more comfortable than before. For one thing, the sound-absorbing windows and air conditioning systems in apartments overlooking the Han River add to the value of their so-called ‘view’ by removing unwelcome noise and smell. The current climate crisis and environmental pollution have resulted from man’s exploitation of nature, but humanity is intent on aesthetizing safety and comfort as the core values of life through a level of sanitation that borders on sterility. At the same time, they try to shirk responsibility by attributing ecological destruction to harmful animals and plants, invasive species, and government policies. The truth is that behind the pleasant environment created by digital technology lies the Janus face of large electricity consumption and carbon emissions involved in eliminating the heat produced by computers. Similarly, city life across the globe is split along clear class-based lines. Walter Benjamin hoped that the availability of mechanical reproduction would help overcome traditional distinctions of social hierarchy. His hopes have now become reality, since most people can easily listen to music, watch movies and express their opinions. However, not many people consider equal access to communications technology and cultural contents as sufficient grounds to believe that social inequality has been eliminated. Cities constantly produce trash, but garbage pickers escape our notice because they work only before the start and after the end of people’s daily life. The amount of trash increases in proportion to the size of the city, but more dangerous is the social climate that considers garbage as an ‘abject’. Most of us have more or less become acclimated to this state of cleanliness. The controversy that arises every time a city announces the site of a new landfill reveals the city-dwellers’ ‘NIMBY’ psychology, an attitude that is based on double-standards. More than ever, cities are trying to erase traces of life. The sophisticated city life is represented by the assorted products displayed in show windows, sleek cars, the media façade mounted on the exterior of skyscrapers, the eye-catching promotion materials and fancy buildings. Technological advances also greatly influence the way cities are represented. Promotional videos for metropolises feature cars racing along sleek roads, performances, modern art, and scenes from pop or classical music concerts, alongside images of traditional cultures. They also show tall, elegant buildings and old palaces, natural landscape, hikers, professional sports, pleasant parks, and groups of people from around the world.  Children, teenagers, people with different occupations, rare natural monuments, pristine nature, and farmers’ smiles almost never fail to be included in these videos, either. Not even a hint of poverty can be observed on the surface of the cities. Needless to say, scenes of conflicts and disasters are completely obliterated. The reason is simple: these symbolic screens only allow positive images. Surreal media art keeps pouring from subway billboards and media façades, while the mechanical voice from the electronic display boards at bus stops constantly remind us of our buses’ expected arrival times. Augmented reality, which relies on digital algorithms to present only what the majority want based on rationality, is the utmost manifestation of technological achievement. Navigation systems constantly update faster, safer routes, as if getting to the destination faster were the best and most important choice. In my case, though, I prefer familiar routes to fast routes, and I am probably in good company. How can I put it; there is a sense of comfort coming from a familiar setting. Sometimes, familiarity helps us to notice changes, too. Fast routes prevent us from appreciating the scenery around us. Cities are obsessed with novelties, without which everything suddenly feels boring.



Ethnography through Sculpture

For Yu Jiwon, art is the source of the strength to live, the motivation to keep going, and a window to new discoveries. His works were inspired by discarded debris, things without name or use that have ceased to draw people’s attention and thus were left completely unattended. He developed an interest in abandoned things while he was studying in France. In fact, regardless of nationality, being on a foreign land implies living as a drifter. The artist went to art school in a city near the Alps, where he had a ‘fateful’ encounter with two Asian friends. One day, while hanging aimlessly around an abandoned railroad, they came across a pile of neglected garbage in a corner of the village. They began to clean it up without any purpose in mind, an act that attracted the neighbors’ attention. They went even further, making a trailer with the trash. They removed the nameless plants covering the old railroad tracks and loaded the trailer with things of unknown use. Then, they pushed the trailer forward, without any particular destination in mind. The neighbors seemed amused by their behavior. Le trajet de l’artiste (single channel video, 2015), a video work that recorded these scenes, would have a significant influence on his future works. Basically, the presence of a pile of garbage in a village suggests failure of the public system to address local problems. He witnessed a similar sight in Gwangju Metropolitan City, where he settled after his return to Korea. It was a long-neglected redevelopment area in Wolsan-dong, a neighborhood in Nam-gu, Gwangju, where he produced Le trajet de l’artiste’s parallel work, Trace-Collector (2019). Its residents must have sustained huge invisible damage from the disintegration and dissolution of memory about a place they once called home, let alone the economic losses caused by suspended construction. For the artist, an abandoned space is not simply an empty place left by people who have moved away; it represents the cold death of a social body.

Cities are, by nature, something new, and thus tend to conceal what’s old or erase the past. Now, social inequality has gone from being an individual issue to becoming the responsibility of the public system. The system evaluates and classifies individuals. The classification of individuals is mainly based on income and disability. In other words, individuals are classified according to their financial status and health condition for administrative purposes and exist as objects of reward or punishment depending on the description, grade, and standard of their assessment. Michel Foucault elaborated the concept of heterotopia to describe the establishment of such places as prisons, hospitals, nursing homes, and dormitories, and their relationship with the city. The government sets up these facilities and restricts individual freedom under the specious guise of management and protection. These individuals are stigmatized as urban misfits and are thus confined or expelled from the city. New kinds of buildings can emerge in response to the needs of the times. Of course, they can also be dismantled for the same reason. The rapid modernization of cities renders past residential spaces old and unproductive, reinforcing the idea that the new is always good and right. As this opinion gains ground, the so-called New Town Development Projects become an inexhaustible source of wealth. Development depletes Earth’s resources and transforms them into a target of financial capital. Yu Jiwon inserts a parasitic space inside the exhibition room, taking its artistic clues from traces of objects found in abandoned spaces. The incomplete structure serves as a metaphor for architectural ornament (Trace-A, corrugated cardboard, wood, acrylic color, 2018/ Trace-E, corrugated cardboard, wood, acrylic color, 2018). A second space/ornament embedded in another space changes and evolves like an organic body in response to the conditions of the surrounding space, often creating a surreal atmosphere (Space structuring: The aesthetics of ruin, installation, mixed media, 2021). This process could perhaps be described as ‘reterritorialization’. At least during the exhibition period, the remaining traces that can be called ‘abjects’ do not exist merely as superfluous residues or insignificant ornaments, but serve to convey a state of uselessness and inadequacy. I believe he didn’t choose light and easy-to-handle materials such as corrugated cardboard and wood simply because they are convenient to work with. These materials reflect the lives of elders who pick up waste paper, a symbol of poverty, and evince the artist’s ethical attitude as well as the trajectory of his life. For example, architect Itami Jun (1937~2011) sought to create architecture that preserved the topography of the land. Instead of flattening the ground, he built stairs in order to maintain its original geographical features. He was guided by the natural expression and shape of the ground. This is exactly what Gilles Deleuze called ‘aesthetics of assemblage’. As is common knowledge, modern cities, which are the product of development projects, are damp and humid because humidity can only be controlled by artificial means. The body and mind of a city can just barely get through the day as if it were suffering from a chronic disease. Dominique Gonzalez-Foester (1965)[1], a conceptual artist based in Paris and Rio de Janeiro, visited Brazil’s capital city of Brasilia. This visit, of course, was intended, since his works consist in following cities designed to embody the ideal of modernity. Interestingly, the ideal of modernity has indeed been realized through large cities, and this may be true of most cities across the world. Here in Brasilia, though, there was an added characteristic, its tropical climate. In other words, he visits areas that have been influenced by globalization and artificialization, but that also have a tropical climate. Brasilia is a completely artificial city. The then Brazilian president who developed the new capital is said to have gotten some of his ideas for the city from ‘La Ville Radieuse’ a book written by the father of modern architecture, Le Corbusier (1887~1965). This urban design project, which emphasizes artificial beauty achieved by perfect symmetrical structures, is quite incompatible with Brazil’s tropical environment. Dominique rents a camcorder and begins filming Brasilia like a tourist, all the while making comments about the mismatch between its architectural style and natural environment.
 

 
Assemblage, Rearrangement of Space
 
The 1960s of Europe, which had gone through rapid modernization, was a time marked by human alienation caused by excessive industrialization. This gave rise to such cultural movements as the Situationist International and Existentialism. In an attempt to challenge the widespread perception of them as tools and the city as a place of labor, students, intellectuals, artists and activists set out on a path to discover the potential of the city and ways to fulfill it. How can a city built on power, politics and industry restore the value of human life? They were not seeking to create a rational power structure that responded to the collective needs of the majority. Rather, they wanted to build a city where artistic spirits prevailed over rationality. To that end, it was necessary to first come up with new ways of arranging society. Philosopher Gilles Deleuze believed that the modes of life structured from the collective perspective should give way to an assemblage tailored for the microscopic world of the minority. Here, the aesthetics of assemblage has to do with the way we perceive the world. In other words, instead of pursuing the social significance of a particular profession or activity, it proposes observing the world through the combination of rhythms, speeds, and tones that change according to their behavior, speaking styles and intensity of expression. This is where ‘affect’ comes into play.
 

 
Yu Jiwon’s works bring together discarded things, neglected people, old roads and nameless grasses that he came across as he hovered around the periphery of the world in search of identity. He tirelessly collected traces of life that had ceased to attract people’s attention. In fact, he did so without any specific purpose in mind. But sometimes, it is through other people that our actions acquire meaning. Actually, this may be true in most of the cases. Encouraged by this experience, he is still searching for discarded things, nameless beings, and traces of life that have disappeared or will soon disappear. His work might come off as a desperate appeal to human compassion, but what it really does is camouflage poverty, whose place has been denied or stolen -the invisible skid-marks of the trailer-, with fragile materials, vibrant colors, and architectural structures.
 

 [1] It is a book published by Le Corbusier in 1933 containing his proposal to build high-rise housing blocks surrounded by abundant green spaces in order to create a city with both urban and rural charms. The project embodied the ideals of modernism, but was criticized for being a uniform and anti-ecological urban plan where people can only enjoy nature from inside, just like the apartment complexes in Korea.







Jung Hyun (Art Critic, Inha University)
 











































감각의 전이, 채집된 흔적이 이끄는 대로 

                                                                                                                                                                                                         




                                                                                                                                                                                                             글. 고영재 (독립큐레이터)






  우리는 종종 버려진 폐가와 구도심의 재개발 현장과 같은 삶의 흔적들에서 모종의 자발적인 동요를 느낀다. 단순히 사적인 기억에 의거한 감정적 일렁임이 아닌 내재된 감각들이 올라오는 의도치 않은 경험으로 인해서, 타자의 낯선 공간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간으로 체화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켜켜이 축적돼온 시간의 흔적과 그것의 소멸이 유발하는 것은, 주관의 객관화와 같은 의외의 명징한 사고적  흐름일 수 있다. 사회 안에서 소외된 장소와 함께 쓸모를 다한 폐기물들의 수집을 바탕으로 입체와 영상 작업을 선보여온 유지원은 이 보잘 것 없는 물질, 혹은 장소들의 본래적 속성을 작업의 형식으로 치환한다. 작가의 서술대로 ‘가치의 재구성’이라는 테마는 사회와 역사적 메시지 따위의 의도된 결론이 아닌, 생성과 소멸의 과정 안에서 파편화된 흔적들이 담보하는 개인 내지는 집단의 사유에 관한 것들이다.
 
  조각을 전공한 그가 애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변화하는 세태 안에서 변화된 공간과 장소들이었다. 비판의 의도가 아닌 오롯이 건축적 구조나 완성도에 흥미를 가졌던 그는 유학시절에 작품의 개념 부재를 느끼며 의식의 확장을 도모한다. 장소적 특질과 우연의 해프닝으로 어우러진 영상 작품 < 예술가의 여정 >이 그것으로, 유지원은 본 작업을 통해 과정 자체가 작품 자체의 함의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영상 속 인물들은 프랑스의 부촌과 빈민가를 아우르는 폐선 부지를 바퀴 달린 수레와 유사한 기이한 이동 수단을 이용해 훑어간다. 철로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나 자연물들을 집적해나가며 집과 같은 하나의 공간이 재구성되지만, 이는 경계가 없는 미완의 공간으로 추상적 공간에 가깝다. 작가는 이 시기를 계기로 버려진 물건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삶을 흔적들을 표현의 영역으로 적극 끌어들인다. 연인의 것으로 보이는 버려진 교환일기는 더욱 빠르게 변화할 시대 안에서 교감하지 못할 낯선 유물로 대변되기도 하고, 철로 근처의 헐린 집터는 타자의 흔적에서 자기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모태가 되기도 한다. 또 다른 설치 작품 < Trace - 폐허의 미학 >은 파리의 도심에 버려진 골판지를 주요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일상을 구성했던 개별적 존재들을 구조적인 어법으로 재구성, 기성 오브제의 본래적 구체성은 추상적인 사물이나 개념으로 전복된다. 건축적 파편인 타일은 더 이상 경계의 역할을 상실한 채 완전한 전체에서 탈피하는가 하면, 물건을 포장했던 골판지들은 외려 통일된 미감의 경계로 구조화되어 원시적인 질감을 드러낸다. 전시장이라는 화이트 큐브의 규격화된 장소는 이러한 기성의 파편들이 제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도리어 의식의 열린 공간으로 변모한다. 더불어, 한톤 다운된 색색의 파스텔 색조로 분한 골판지는, 일종의 환기 장치로 관람자로 하여금 내재된 감각을 이끈다. 흔적 시리즈를 비롯한 < Trace - Un(Building) >과 같은 이 즈음의 비슷한 유형의 작품들을 볼 때, 작가는 가치의 전복과 재구성에서 감상자들의 의도하지 않은 감각들이 올라오고, 결국에는 풀어헤쳐진 이 낯선 장소에 체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

  유지원의 근작들은 종전의 성향보다 더욱 집요한 관찰이 돋보인다. 유년시절을 포함한 과거에 경험했던 공간들이 이미 소멸되고 사라진 것을 목도하면서, 장소성이 이끄는 누군가의 시간과 기억들을 작업적 범주로 에두른다. 건물을 짓거나 허무는 장소를 관찰하면서 체득한 건축적·실용적 이미지들을 작품의 형식으로 차용하거나, 폐지와 폐품 등의 버려진 것들과 현대의 건축물들이 함축하는 사회 문화적 관계에 천착하며, 어느 정도는 비판적 시선에서 이야기를 끌어가기도 한다. 유지원의 작업은 관찰의 과정에서 길어 올린 사유의 단편들을 집적하는 과정이니만큼 일관되게 거친 느낌을 자아낸다. 그의 작업적 힘은 자유롭게 던져지거나 재구성된 구조가 관람자로 하여금 각기 다채로운 감각과 사고를 가능케 하는 지점에서 발휘된다. 가장 최근의 경향은 이전보다 정제되고 가공된 느낌으로, 기존 작업의 결과 다소 다른 양상을 띤다. 다양한 형식적 실험의 단행은 고무적이지만, 생각의 폭이 확장되었다가 외려 형식적 틀 안에 갇혀버린 느낌이 들기도 한다. 덜어낸 형식에서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려 함은 긍정적이나, 작품을 접하는 이들의 감각과 사유를 일깨우는 작업 자체로서의 자율적 힘은 유지원 작업의 큰 장점이자 지속성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작가는 관람객이 작품 앞에 오랜 시간을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자신만의 손맛이 느껴지는 작품 안에서 스스로가 채 인지하지 못한 다양한 생의 기운들이 살아나기를 또한 바란다. 열린 공간의 열린 해석으로 다양한 감각들이 작품 안에서 전이될 수 있다면 좋겠다. 
‌                                                                                                                                                                                               2021 < 대인예술곳간 묘수-3기 > 작가 현장 크리틱













Transfer of Senses: Where the Collected Traces Lead Us_
 




We often feel a kind of voluntary unrest, when facing the traces of life from abandoned houses and redevelopment sites in the historical downtown. It is not a mere emotional ripple based on personal memories, but an unintended resurfacing of inherent senses. We thus embody the unfamiliar space of a stranger as a time no longer unfamiliar. In a way, the traces of time accumulated layer after layer and their disappearance cause an unexpectedly lucid stream of thought, resulting in the objectification of subjectivity. Through his three-dimensional and video works based on the collection of exhausted wastes and marginalized places, Yu Jiwon renders into artwork these worthless materials and the original traits of excluded places. As the artist states, the theme of “reconstruction of values” is not about the intentional conclusions, exemplified by social and historical messages, but about the thoughts of individuals or groups triggered by the fragmented traces in the process of creation and extinction.

After majoring in sculpture, Yu was initially interested in the altered spaces and places in the changing world. He was interested, without the intention of criticism, in the architectural structure and its degree of completion. During his study abroad, Yu felt the lack of conceptuality and attempts to expand the perception. In his video work the Journey of an Artist, composed of spatiality and coincidences, Yu Jiwon realizes that the process itself can become the artwork’s meaning. The characters in the video use eccentric transportations such as a wheeled wagon, traversing the ship graveyard encompassing the affluent villages and slums in France. The discarded garbage or natural objects around the railroad tracks accumulate to reconfigure into a house-like space. But this is a boundless, unfinished space close to abstraction. During this period, the artist became interested in discarded objects, and he actively uses traces of life in his expressive works. Abandoned exchange diaries that may belong to lovers become unfamiliar relics estranged from the rapidly changing era, and the ruins of a house near the railroad tracks become the basis for personalizing the traces of others. Another installation work Trace - Aesthetics of Ruins consists corrugated cardboard discarded in the city center of Paris. By structurally reforming the individual materials that constituted our daily life, the original concreteness of the ready-made object is subverted into an abstract object or a concept. The tile, an architectural fragment, loses its role as a boundary and breaks away from the complete whole, while the corrugated cardboard used as wrappings is structured as a boundary of a unified aesthetic, revealing a primitive texture. The standardized space of the white cube called the “exhibition hall” is transformed into an open space of consciousness as these established ready-made fragments lose their function. What’s more, the corrugated cardboard divided into toned-down pastel colors functions as an evocative device that leads the viewer into inherent senses. Through similar works of the Trace series and Trace-Un(Building), the artist wishes to evoke the viewers’ unintended senses through the subversion and reconstruction of values, and eventually embed the viewers in this unraveled, unfamiliar place.

Yu Jiwon's recent works shows more of his tenacious observation than before. As Yu observes spaces—his past including his childhood—go extinct, his work gathers from spaces the time and memories of others. He borrows in his work’s forms the architectural and practical images found in buildings built or demolished, and he delves into the social and cultural relationships implied by modern buildings and discarded materials such as wastepaper and garbage, to some extent critically. Yu’s work consistently evokes a rough feeling as it is a process of accumulating fragments of thoughts dipped up in the process of observation. His artistic power allows the viewers colorful senses and thoughts through the freely thrown or reconfigured structures. His most recent works are more refined and processed than before, taking on somewhat different shades than his previous work. The execution of various formal experiments is encouraging, but often it may seem as if the scope of thought is expanded yet locked up in a formal frame. It is favorable that many stories are drawn from the reduced form, but it is the autonomous power of the work itself—which awakens the senses and thoughts of those who encounter the work—that may be the great strength and continuing force of Yu Jiwon's work.

The artist wants viewers to linger in front of his works for a long time, and he also hopes that the various energy of life—even the ones he was unaware of—come alive in the work imbued with his own touch. I hope for an open interpretation in an open space, so that the different senses can be transferred in his works.






2021  Artist Site Critique

Independent Curator Koh Youngjae








































사라진 삶의 잔편들로 ‘가치의 재구성’

                                                                                                                                                                                                         




                                                                                                                                                                                            글.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요즘 세상 도처에 재개발이 끊이지 않는다. 묵은 삶과 낡고 헐어 빛이 바랜 살림은 번듯한 도회지 질서에 반한 듯 재단장 되어야 할 전근대적 폐기대상들이 되었다. 사라지는 것은 공허와 아련함을 남긴다. 오래토록 가족사를 꾸려왔거나 고향 떠나 이 도시 한 켠에 자리 잡고 현실사회에 동승하려 애쓰던 삶의 터전들은 가슴 속 추억과 누군가의 사진들로만 남게 되었다. 누구라도 그와 무관한 이는 없다보니 사라진 삶의 터전과 골목과 동네를 추억하는, 도시의 재개발을 소재로 삼은 시각예술 작업들이 꽤 많다.

  유지원의 도시 재개발을 소재로 한 작업도 이 같은 시대적 공감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도 또한 시골이 고향인데다 대학 졸업 후 답답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의 출구를 찾아 2년간 일본생활을 거쳐 프랑스로 건너가 8년 동안 다시 공부하고 활동하다 지난해 돌아오기까지 10여년을 떠나있었던 입장이다. 더구나 수백 년씩 덧쌓이고 지속되는 유럽의 도시문화나 건축물들과 달리 짓고 없어지는 것이 순식간이면서 불과 몇 년 사이에 도시의 풍경이 급격히 바뀐 고국의 상황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는 대학에서 세밀한 묘사위주 구상조각에 회화적 서사를 곁들이는 작업을 익혔고, 대안미술을 추구하는 신예들의 ‘그룹퓨전’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프랑스 유학 중 조형작업의 토대로서 다각적인 철학적 사유를 지도받고, 기존의 고정관념과 작업의 틀을 벗어나기 위한 모색들을 시도했다. 그 선례인 ‘아트 포베라 Arte Povera’ 활동을 참조하기도 하고 은유와 풍자가 깔린 개념적인 작업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흐르지 않는 호수에 떠 있는 패널들 위의 자화상들을 한 화폭에 묘사하여 정체감과 번뇌를 드러내기도 하고, 진짜 사과는 썪어 가고 가짜만 남는 세상, 흙으로 빚은 것이긴 하지만 똥들이 잔뜩 깔린 전시장에 개 한 마리가 돌아다니는 풍경, 남성근육 키트 완구들로 변질된 육신을 표현하는 등의 작업이 그런 예들이다.

  그런 개념적 작업과는 전혀 다르게 폐기된 삶의 흔적을 찾는 유지원의 작업은 폐선 철로 퍼포먼스인 < 예술가의 여정 >(2015)에서 전환점이 만들어졌다. 쓸모없어져 방치된 도시 폐선 철로를 동료들과 함께 우거진 잡목들을 제거하며 끝 모를 여정을 계속하는 행위를 영상으로 담아놓은 작업이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 청년작가 셋이서 사전 각본 없이 현장에서 수집한 자재들로 이동용 단차를 만들어 타고 수없이 부딪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의 기록이다. 산업철로로 상징되는 도시 근대화의 현재 뒷 그늘과 함께 청년기의 불안정한 현실을 뚫고 불확실하지만 미래를 향한 의지를 다지는 현실기반 행위영상이다.

  화려하고 번듯한 새 것보다는 오래되고 낡은 것에 대한 유지원의 관심은 사라진 집의 흔적들을 조형화시켜낸 2018년의 ‘장식적 가치’ 연작으로 나타난다. 허물어진 벽체나 계단 같은 집의 파편들을 골판지로 재현하고 채색을 입혀 그 자체로 조형적 구성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파편들의 조합이면서도 유럽 주택들의 건물구조나 색채들과 함께 시멘트벽이나 모자이크, 벽지 등 갖가지 벽체 질감까지 더해져 사라진 본체를 대신한 삶의 잔편들이 특별한 가구조형물로 재탄생된 작업들이다.

  지난해 한국에 돌아온 뒤 유지원에게 달라진 광주의 모습은 당혹스러운 풍경이었다. 도심 공동화로 활력이 떨어진 원도심권이든 변두리 소시민들의 달동네든 오래 묵은 삶의 터전들은 재개발로 털려나가고 그 자리엔 예외 없이 고층아파트단지들이 장벽을 치고 들어선 진풍경인데, 계속해서 동네단위 주택지들은 사라지고 그 삶의 주체들은 무표정한 거대아파트 속으로 흡입되거나 낯선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다. 도시 곳곳에서 진행 중인 재개발지구에서 삶의 체취를 채집하는 유지원의 ‘흔적 수집가’ 활동은 설치와 영상작업으로 옮겨진다. 대형 유통점의 쇼핑카트를 끌고 철거된 재개발지구 폐허 속을 돌아다니며 개인이나 가족, 마을의 존재를 되짚는 흔적 찾기이다.

  수집된 생활소품들과 함께 집주인의 삶과 세월이 배인 주택의 목재들을 모아다 목조구조물을 설치하기도 한다. 2019년 선보인 < Trace-(un)Building >인데, 뼈대만 남은 집 공간을 구성하고 거기에 전구와 요강과 선풍기, 난로, 깨진 기와 같은 채집된 오브제들을 들여놓고 낡은 TV 모니터로 재개발지구에서 채집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소한 소품이든 재조립된 건축구조이든 이를 통해 공허한 회상 속에 남겨진 그곳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내고, 개발의 그늘에 가려진 파편화된 도시생활사를 되비춰내는 것이다.

  유지원의 재개발지구 채집작업은 마을과 집들의 흔적과 함께 그 공간의 주체인 인물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접근도 중첩된다. 그 매개고리이자 오브제인 폐지는 누군가의 삶의 흔적이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생업을 꾸려가는 일거리들이 되기도 한다. 버려진 폐지의 재활용은 현생의 주 무대 밖 노인들의 일상을 재활용하는 것이면서 수입원이자 소일거리로서 소박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최근 유지원은 그 폐지줍기를 노동투입 대비 시급으로 환산한 수치를 폐지설치물과 함께 < 노동의 가치 >라는 작품으로 사회적 의미를 들추어내기도 하였다.

  유지원은 화려하고 산뜻한 현대문명 이면의 인간적 온기와 정겨움을 조형적인 작업으로 재활용해내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그것은 철거된 재개발지구나 집들에서 채집한 삶의 잔편과 자취들을 시각적 조형작업으로 전환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련의 작업에서 다만 해체된 개개인의 가족사나 마을구성원들의 삶의 흔적과 온기를 되짚는 작업일지라도 그것을 채집하는 과정이나 발견된 오브제의 제시만이 아닌 ‘가치의 재구성’을 보다 독자적으로 특화할 수 있는 명료한 조형해석이나 변환도 필요하다고 본다. 세상의 소재들을 선택하고 집약해서 시각적 이미지의 구성미와 완성도를 높이는 창작의 숙성작업들을 기대한다.
‌                                                                                                                                                                            2020광주문화재단 미디어아트레지던스 비평가매칭 프로그램












The Lost Debris of Life and the “Reconstruction of values” _




Today, urban redevelopment projects continue all over the world. Aged lives and fading, worn-out households become outmoded objects ought to be disposed and refurbished, as if they go against the affluent urban order. Disappearing things leave behind emptiness and sentimentality. Gone are people’s homesteads with long family histories and the places people settled down after leaving their hometown to assimilate to the urban reality. Only memories and photos remain. Urban redevelopment, as a phenomenon no one is completely free from, is the subject of quite a few visual art works—works that recollect lost homes, alleys, and neighborhoods.

Yu Jiwon's works on urban redevelopment are also based on the same historical sympathy. He also comes from rural parts of Korea, and after graduating from college, he spent two years in Japan in search of an escape from the frustrating reality and unclear future. He subsequently moved to France, studied and worked as an artist eight years there. He himself, before returning to Korea last year, had spent ten years abroad. Further, after witnessing European urban culture and buildings that accumulate and persist for hundreds of years, it would have been disconcerting to see his homeland’s instantaneous deconstruction and reconstruction, and the resulting rapid change of the urban landscape in just a few years.

Before leaving Korea, he learned to layer pictorial narratives to detailed description-based figurative sculptures at college. He also participated in the “Group Fusion” project by young artists pursuing alternative art practices. After all such activities, in France he studied multifaceted philosophical thinking as the basis of his artistic work and attempted to seek ways to break free from the existing stereotypes and frameworks of art. He referred to the Group Fusion’s predecessor, the “Arte Povera” project and presented conceptual works infused with metaphors and satire. He expressed stagnation and anguish by depicting on canvas self-portraits on panels floating in a still lake. Other examples include his work of a world where real apples are burned and only fakes remain; scenes of a dog wandering around in an exhibition space full of dung made of clay; the representation of degenerated bodies with male muscle-kit toys.

Truly unlike such conceptual works, his current works that search for traces of discarded life began from his work, the Artist's Journey (2015)—a performance on an abandoned railroad track. It is a video work that captures the endless journey by removing overgrown weeds together with colleagues on an abandoned and obsolete urban railway track. It is a record of three young artists from different countries moving forward without a prior script, removing countless obstacles while riding a movable pulley they made themselves with materials collected on site. It is a reality-based performance video that breaks through the unstable reality of adolescence—young artists solidifying the will for the yet unclear future, under the shadow of the present urban modernization symbolized by industrial railroads.

Yu Jiwon's interest in old, worn-out things over flashy, luxurious new things shows in the “Decorative Value” series in 2018, which formalizes the traces of a lost house. Fragments of houses, such as torn-down walls and stairs, are reproduced with corrugated cardboards and painted to become a visual composition by itself. The works are not only a combination of fragments, but also debris of life that replace the lost form, reborn as special furniture-structures by adding various wall textures such as cement, mosaic, and wallpaper along with the building structures and colors of European houses.

When he returned to Korea last year, Yu found the change in Gwangju to be a disconcerting sight. Original downtown area lost its vitality due to urban hollowing-out; the old, hillside ghettos of townspeople on the outskirts are plundered due to urban redevelopment; high-rise apartment complexes have entered without exception—a scene of true ghastliness. Agents of lives are either sucked into the expressionless large apartment complex or are leaving their hometown for an unfamiliar region. Yu Ji-won, the “trace collector,” gathers the scent of life in ongoing redevelopment projects throughout the city, and his gatherings are transferred into video-installation works. He finds traces of existence left by individuals, families, and villages, while dragging shopping carts from large-scale distribution stores and walking through the ruins of the demolished redevelopment district.

Along with collected household items, Yu also installs a wooden structure by collecting wooden materials from a house imbued with the time and life of the owner. Named Trace-(un)Building, this work in 2019 models a house space in its skeletal form, and gathers objects such as light bulbs, pots, fans, stoves, and broken tiles in the space. The collection process in the redevelopment district is displayed in an old TV monitor. Whether it is a small prop or a reassembled architectural structure, Yu’s work connects the past and the present of the remaining spaces that exist as an empty recollection, reflecting the fragmented history of urban life hidden in the shadow of development.

Yu Jiwon's collection works from the redevelopment districts also overlap with an approach to re-illuminate not only the traces of villages and houses, but also the lives of the people who are the subjects of the space. Wastepaper is at once the linking hook and the object—it is a trace of someone's life as well as a bread-and-butter work for someone else. Recycling discarded wastepaper is to recycle the daily life of the elderly who stands outside the main stage of life, and it also possesses a small value as a source of income and a pastime for the elderly. Yu recently disclosed the social significance of the wastepaper collection through a work called Value of Labor, where he converts the collecting of wastepaper into a numerical figure using an hourly wage per labor input, alongside a wastepaper installation.

Yu’s interest lies in reusing in his artistic work the human warmth and affection on the other side of the glamorous and urbane modern civilization. It transforms into visual-sculptural work the fragments and traces of life collected from demolished redevelopment districts and houses. Even if his work only goes as far as retrieving the traces and warmth of the lives of dismantled family or village members, it should not limit itself to collecting and presenting the discovered objects. It is also necessary to find clear visual analysis and conversion that focuses on the “reconstruction of values.” I look forward to seeing mature works that select and integrate materials from our world, with enriched compositional beauty and completeness of the visual image.




2020 Gwangju Cultural Foundation Media Art Residency Critic-Matching Program


 Cho Inho (Director of Gwangju Institute of Art and Culture)
















































: 발췌된, 그리하여 사유화된 기억에 관하여

                                                                                                                                                                                                         




                                                                                                                                                                                                 글. 유원준 (미학, 영남대학교 교수)







한 개의 직선이 두 개의 운명적이고 피할 수 없는 점들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거리라면, 이탈하는 선들은 그 길이를 늘릴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탈선들이 너무 복잡해지고, 너무 얽혀 뒤틀려 지고, 너무 빨라져서 그것들 만의 궤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누가 알겠는가-아마도 죽음은 우릴 찾지 못할 것이며, 아마도 시간은 그 길을 잃어버릴 것이고, 아마도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이동하는 은신처들 속에 몸을 숨긴 채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 Carlo Levi, Six Memos for the Next Millennium


     




     카를로 레비의 위와 같은 문장은 가장 짧기에 효과적이며 빠른 시간성을 확보한 선분의 수학적 정의에 기초하고 있지만 결국 탈선한 선들이 내몰리는 시야 밖 공간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합리와 이성의 틀에서 벗어난 이러한 선들은 우리의 인식 밖 영역을 사유하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다만, 그것이 지금까지의 사회적인 질서를 벗어나고 있기에 이는 그 자체로 얽히고 설켜있는 우리네 인생에 관한 유비가 된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마지막 문장에서의 죽음과 시간 그리고 은신처와 같은 키워드들이다. 갈 곳을 잃어버린 채 허공을 멤도는 궤도를 이탈한 선들은 결국 의미가 퇴색되어 그 존재 자체가 은폐되고 몸을 숨길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지게 된다. 작가에 관한 비평문을 이렇듯 장황한 설명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그가 주목하는 지점 또한 레비의 언급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식 속에서 사라져가는, 의미에서 미끄러지는 버려진 공간의 기억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폐허에서 공간의 조각들을 재조합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언뜻, 이미 기능을 잃어버린 건축 자재들을 모아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의미로서 재탄생 시키는 작업처럼 보이지만, 그 모임의 형태를 살펴보면 사회적 맥락에서 재활용으로 정의되는 자원의 재-분배 및 재-기능화 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아마 한 번이라도 폐허가 된 공간을 방문해 본 이들이라면 공간 자체가 제공하는 강렬한 기운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강렬한 공간의 기운은 의미가 벗겨지고 어긋나버려 장소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 순간에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쓸모가 없어졌기에 공간의 의미는 방향을 잃은 채, 그 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투사되는 까닭이다. 작가가 주목하는 지점이 바로 이러 한 지점이다. 작가는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의 건축물에서 탈 의미화된 요소들을 선택하고 이 것을 새로운 공간에 늘어놓는다. 그러나 여기에 별다른 장치를 가미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과거 완전한 의미 복합체로서 기능했던 부분들이 그 의미에서 누락되는 바로 그 순간을 전시장 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선보이는 것이다. 금번 광주 미디어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및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의 경우, 도처에서 발견한 버려진 건축 자재들을 다시 재조합하여 축조된 일종의 건축물이자 가공간(假空間)이다. 작가는 쓰레기 더미에서 다시 의미의 자리로 복권될 수 있는 건축 자재들을 모아와 이러한 공간을 구축하는데, 전시장이라는 환경의 특성상 하나의 완결된 건축물로 기능화되거나 의미화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건물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는 그러한 의미로의 복원 과정을 거부하는 듯, 과거의 기억들을 간직한 채 관객들에게 그 생경한 속살을 스스럼없이 드러내 보인다. 언뜻 보편적으로 집처럼 보이는 이 건축물이 결국 우리가 정의하는 ‘집’으로 규정될 수 없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모여 있지만 그들은 결코 같은 성질의 무엇으로 통합될 수 없으며 정주(停住)적 성격을 가지지도 않는다. 따라서 관객은 집으로 보이는 공간으로 진입하지만 결국 더욱 낯설은 풍경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작가의 이와 같은 시도는 과거의 작품에서부터 이어진다. 가령 2018년의 작업 의 경우, 계단의 일부분을 전시장으로 가져와 설치한 작품으로서 관객들로 하여금 본래의 공간 속에서 기능적 역할을 수행했던 계단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치 전체 문장에서 전체의 의미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혹은 다음 문단으로의 연결을 수행하는 접속사 하나를 문장에서 발췌하여 그 단어 하나만 덩그라니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 은 어떤 측면에서는 친숙하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황당하기까지 하다. 관객은 이러한 장면에서 결국 그러한 접속(사)의 앞과 뒤를 자신의 기억의 장면을 통해 채워넣게 된다. 따라서 작품의 건축적 요소는 결국 본래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억과는 무관한, 관객에 의해 사유화된 기억의 일부분으로 편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은 파편적으로 모여진 키워드들의 집합체로서를 확장시킨 작업이다. 각각의 요소는 일정 정도의 흔적을 통해 스스로의 기억을 내포하고 있으며 작가 역시 가건물 안에 설치해 놓은 TV를 통해 현재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각 요소들의 발췌의 순간을 기록해놓고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다만 그러한 기록물은 현재의 건축적 요소들의 전체적 의미를 완성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관객 스스로의 사유화된 기억의 파편들을 전시장 한켠에서 소환하도록 만드는 기폭제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2019광주문화재단 미디어아트레지던스 비평가매칭 프로그램













: On Memories Excerpted and Thus Privatized_



If a straight line is the shortest distance between two predestined and inevitable points, the deviating lines will increase in their lengths. And if these deviations become too complex, too twined or twisted, and too fast that their unique trajectories be unseeable, who knows—perhaps death would not find us, perhaps time will lose its way, and perhaps we ourselves will be able to linger, hidden in mobile hideouts.
 
- Carlo Levi, Six Memos for the Next Millennium



Carlo Levi's above words begin from the mathematical definition of line segments—the shortest and fastest in temporality, thus effective. But ultimately his thoughts expand to a space outside our field of vision where deviated lines end up. Outside the frame of rationality and reason, these lines encourage us to think beyond our perception. Yet, since they depart from the persisting social order, they themselves become an analogy of our convoluted lives. Particular attention should be paid to keywords in the last line, such as death, time, and hideouts. Lines that deviate from the orbit thus rove around the void without a place to go. Their meanings fade, and they are doomed to hide and cover up their existences. I begin my critique of Yu Jiwon with such lengthy explanations because Yu, like Levi, also starts from the memory of an abandoned space, a space disappearing from our perceptions, slipping away in their meanings.

The artist’s works recombine pieces of space in the ruins. At first glance, they seem to be works that gather used-up building materials, reinventing them freshly in a separate space. But these gatherings show that Yu’s works differ from socially defined “recycling” that redistributes and revives resources. Those who have visited ruined spaces have probably felt the intense energy provided by the space itself. Perhaps this intense energy of space is generated when the space is stripped and warped of its meaning, losing its purpose as a space. The space still maintains the looks we remember, but since the space is now useless, its meaning loses its direction and is projected onto the visitors. The artist focuses on precisely this point. He selects these elements without meanings from architectures of ruined spaces and arranges them in a new space. But he does not add any special devices. In the exhibition hall, which is the new space, the artist presents the failure of parts that once functioned as a complete body of meaning. His current works shown in Gwangju Media Art Residency Program and Festival are fictional spaces—structures created by recombining discarded building materials found everywhere. The artist builds such spaces by gathering redeemable building materials from a pile of garbage. Due to the nature of exhibition halls, these re-buildings cannot be fully functionalized or signified as a complete, coherent construction. Rather, each component of the work seems to reject this restoration process. It retains its past memories and reveals without hesitation the unexpected nudity. Such is the reason why this building, which may seem a common house, ultimately cannot be defined a “house” as we define it. Together, the pieces can never be united into homogeneity, nor are they sedentary. Hence, although the viewer enters a space resembling a house, they ultimately must face an increasingly unfamiliar landscape.

The artist's such attempt continues from his past works. For example, his work in 2018 brings and installs a part of the staircase into the exhibition hall. It thus reminds the viewers of the past when the staircase played a functional role in its original space. It is like extracting and isolating a conjunctive particle that was supporting the whole semantic structure of a sentence or was connecting two different paragraphs. Similarly, the artist's works are likewise at once familiar and absurd. In such instances, the viewer must fill in the preceding and following conjunctions through their own memories. Thus, the work’s architectural elements are incorporated as a part of the viewer’s privatized memory, unrelated to the original memory the materials possess. In this context, Yu’s work expands the aggregate of gathered fragmentary keywords. Each element retains its own memory through certain traces; using the installed TV in the temporary building, Yu Jiwon also records and shows the moment when the materials composing the present work/space was extracted. Such records, however, do not fulfill the role of completing the overall meaning of the present architectural elements. They only serve as a catalyst for the viewers in the exhibition hall to summon fragments of their own privatized memories.







2019 Gwangju Cultural Foundation Media Art Residency Critic-Matching Program


Wonjoon Yoo (Professor of Aesthetics at Yeungnam University)